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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친사회적 행동과 반사회적 행동

by 선한부자 캡틴박 2022. 1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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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성: 논리일까 아니면 정서일까?

심리학자들은 한때는 도덕성을 빨간 불에서는 멈춰 서고, 녹색 불에서는 가는 것과 같은 일종의 임의적 규칙으로 간주했었다. Kohlberg는 도덕 추론을 Piaget의 인지발달 단계와 유사한 일련의 단계를 통해 성숙해 가는 과정이라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6세 이전의 어린아이들은 값어치가 덜 나가는 물건을 고의로 깨뜨린 것보다 값어치가 큰 물건을 실수로 깨뜨린 것이 더 나쁘다고 말한다. 보다 나이 든 어린이와 어른은 결과가 아닌 의도를 중시한다. Kohlberg에 따르면 이런 변화는 규칙의 기억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발달이다. 추리 능력이 성숙함에 따라 사람들은 정의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에 기초하여 도덕성을 판단하게 된다.

 

Kohlberg에 따르면 사람들의 도덕 추론을 평가하려면, 그들이 내리는 결정 자체가 아닌 결정의 이유를 물어야 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닥터 딜레마>에서 두 남자가 죽어가고 있다. 그 도시에서 단 한 명뿐인 의사는 둘 중 한 명만을 살릴 수 있는 의약품밖에 없다. 한 사람은 예술 천재이지만, 정직하지 못하고 무례하고 무뚝뚝하다. 다른 사람은 훌륭한 성과를 내지 못할 사람이지만, 정직하고 겸손하다. 의사는 선택해야만 했고, 정직하지만 재주가 없는 사람을 구했다. 그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Kohlberg에 따르면, 이런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올바른 질문은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느냐이다. 희곡에서 의사는 예술 천재가 죽은 다음, 그의 아내와 결혼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에 그 선택을 했다.

 

Kohlberg는 심리학자들에게 도덕적 결정 뒤에 숨어 있는 추론 과정에 주목하도록 했지만, 사람들이 늘 행동하기 전에 옳고 그름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결정을 빨리하고, 나중에 그 이유를 찾는 경우가 더 많다. 인지심리학의 용어로 말하면, 우리는 최초의 결정을 위해 체계 1을 사용하고, 이미 결정한 체계 1을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설명하기 위해 체계 2를 사용한다. 다음의 예를 보자. 철수와 여동생 순희는 대학생이다. 방학 동안 그들은 함께 여행을 떠났고, 하루는 통나무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재미를 위해 서로 섹스했다. 순희는 피임약을 먹었지만, 철수는 확실히 하기 위해 항상 콘돔을 사용했다. 둘은 그 경험을 즐겼고, 누구도 어떤 식으로든 상처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는 섹스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것을 작은 비밀로 지녔다. 그들은 섹스 이전의 형제자매 관계보다 더 가깝게 느끼고 있다. 그들의 행동에 문제가 없나?

 

대부분의 사람은 즉각 "노노노"라고 반응한다. 왜? 철수와 순희는 두 가지 믿을 만한 피임법을 사용했고, 둘 다 즐거웠다고 말했으며, 상처받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가 옳지 못한 것이라면, 왜 옳지 못한 것인가? 당신도 그들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가? 당신은 아마도 즉시, 직관적으로 정서적으로 결정했을 것이고, 나중에 그 결정을 정당화하려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도덕적 결정이 인지적 보다는 직관적이고 정서적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Kohlberg의 분석은 또 다른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있다. Kohlberg에 따르면, 도덕성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근거는 정의를 추구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교육 받은 미국인과 유럽인, 특히 진보 정치인들에게 잘 맞지만, 전 세계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표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집단에 대한 충성, 권위자에 대한 존경, 그리고 정신적 순결함에 근거하여 결정을 내린다. 예를 들어 철수와 순희의 근친상간은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즐거웠다고 말하느냐와 상관없이 정신을 더럽힌 불순한 행위였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특정 유형의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의 도덕적 사고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Kohlberg가 고려한 것 그 이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타행동

왜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면서 타인을 돕는 이타행동을 할까?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타주의는 다른 동물에게서는 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즉 대부분은 모든 종에서 동물은 자기 새끼나 친족을 돕기 위해 상당한 에너지를 쓰고 목숨의 위험을 감수한다. 그러나 자신과 관련이 없는 동물을 돕기 위해 그러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한 연구에서 침팬지들은 각각 두 개의 줄 중 하나를 당길 수 있었다. 때로 한 줄은 음식이 달려 오지만, 다른 줄은 아무것도 달려 나오지 않았다. 침팬지들은 항상 음식이 따라오는 줄을 선택했다. 또 다른 때는 한 줄은 음식을 가져오고, 다른 줄은 자신을 위한 음식과 다른 우리 안에 있는 침팬지를 위한 음식 모두를 가져왔다. 통제권을 쥐고 있는 침팬지는 다른 침팬지가 구걸하는 제스처를 취하더라도 다른 침팬지에게 무관심해 보였다. 대개 침팬지는 어떤 줄이 다른 침팬지의 음식을 가져다주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오른쪽 줄을 당겼다.

 

만약 이타주의가 나머지 동물 세계에서 흔한 일이 아니라면, 왜 인간은 서로를 도울까? 당신은 우리가 남을 돕는 것은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지만 왜 기분이 좋을까? 이타행동이 좋은 기분을 느끼게끔 유전자가 진화되었나? 만약 그렇다면, 왜? 누구도 그런 유전자를 찾지 못했고, 만약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하다 해도 어떻게 자연선택이 이런 유전자를 선호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론적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당신 이타적 유전자가 그 종에게 도움이 된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렇다. 하지만 만약 한 유전자가 그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사람에 비해 지니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또는 더 많이 도움이 된다면, 그 유전자는 개체군에 퍼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주제를 유전과 무관한 용어로 설명한다고 해도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즉, 만약 당신이 타인을 돕는 습관을 학습한다면, 그들은 이익이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학습하겠는가? 연구자들은 이런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게임 상황을 이용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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